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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공연소개]
바냐는 극중 나이 마흔일곱이 되도록 자신의 삶에 관해 결단을 내려본 일이 없다. 자신과 자신이 부양해야 할 가족 ㅡ 꼭 그것이 아내와 자식이라는 형태가 아닐지라도 ㅡ 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, 의식을 가져본 일이 없다. 대신에 그는 이상주의적인 사회에 대해 꿈꾸며 귀족임에도 노동자의 삶을 살며 새로운 삶을 향해 헌신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. 그래서, 참 염치없게도 이십오 년의 호의를 권리로 착각한 교수가 은퇴하고 젊은 새 아내와 함께 어린 딸의 영지로 굴러들었을 때, 바냐의 장미빛 안경이 걷혀 노년을 바라보는 자신의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감지할 때 비극이 시작된다.
철이 든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두 발로 지탱하고 있다는 의식이다. 평생토록 철 들기를 회피하고, 이를 가능케 한 아주 그럴 듯한 이유 ㅡ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간다는 이상, 새롭고 진보적인 예술에 대한 전망 ㅡ에 기대어 세월을 허비한 사내가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은 발가벗겨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느낌 같다. 도무지 아무 것도 도모할 수 없어서 마치 좀비와 같다.
안똔 체홉은 이 작품에 슬쩍 종교에 관한 생각을 얹어놓는다. 쩰레긴의 헤어진 아내를 향한 헌신은 극미에 쏘냐가 바냐 삼촌에게 눈물로 위로하며 설득하는 삶 그대로이다. 언뜻 암울하게 들릴지라도 그 안에는 어떤 고통스런 삶이라도 긍정하고 살아낼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기도와 비슷한 뉘앙스가 있다. 체홉은 무신론자였지만 믿음이 주는 근원적인 힘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.